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라?
조병문
201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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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가 보면 성경의 흐름이 막힐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번역으로 인한 문제점이며 문법적인 적용을 잘못해서 생긴 부분이다. 또한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문장과 단어의 취사선택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당하지 않으신 분이다.(약 1:13) 그런데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당한 일이 있다.(고전 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시험한 예가 너무나 많다.(출 17:2, 민 14:22, 시 78:18, 시106:14, 사 7:12, 행 5:9, 히 3:9 등)
그런데 성경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간접적으로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개역성경 말라기 3:10에서만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유일하게 시험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특히 이 구절은 목회자들이 십일조생활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는 말씀이다. 십일조를 할 때만이라도 하나님을 시험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말라기 3:10에 ‘나를 시험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우베하누니’라고 하는데 접속사와 ‘우’와 ‘증명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뜻의 동사 ‘바한’과 ‘나를’이라는 뜻의 목적격 접미 대명사 ‘에니’가 한데 어우러진 합성어로 시험이 아닌 “증명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언급할 때 시험이라는 단어는 ‘바한’이 아닌 ‘나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싸’는 헬라어 페이라조와 같이 영어로 Test, Tempt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바한’은 헬라어로 도키마조 영어로 Prove라는 의미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거나 증명하는 보이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영어성경은 두 단어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채택하고 있지만 한국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또한 영어성경에는 귀신이란 단어와 성령이란 단어를 구분되어 있는 반면 한국성경은 이마저도 구분되어 있지 않아 더욱 좌충우돌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작업을 펼치려면 많은 인재들과 재정이 절실하며 많은 시간을 요하고 있어 독자들의 기도와 성원을 부탁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망상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또한 십일조뿐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절대로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이다. 아니면 내가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셨으니까 이렇게 해보라는 간증은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신 십일조는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여 마음을 나타내고 증명하여 보이라는 의미에서 십일조를 하라는 의미임을 다시 한번 천명하는 바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나의 것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것뿐이며 주님과 한 몸이 되게 한 부활의 옷을 입고 살리신 영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 생활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도 “확증”이라는 도키마조로 되어 있으며 엡 5:10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도 시험이 아닌 증명하여 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상태를 자신 스스로 입증하고 확인하여 보라는 의미라는 것을 안다면 번역상의 단어 취사선택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말라기 3:10의 말씀 원문은 직역한다면 나 만군의 여호와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바치는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 창고에 가져와서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인지 언급한 바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양식은 우리가 먹는 음식도 아니며 영혼의 양식도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너희가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내 앞에서 너희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라.(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어 하나가 된 상태가 온전한 상태를 입증해 보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신앙의 행위도 중요하지만 신앙의 상태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내가 하늘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부어주되 절대로 닳아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부어주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복이란 개념이 중요한데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언급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우리가 잘 되는 것도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과 확연히 구분된 복의 은총이 무엇인가? 어떤 조직이나 체계적인 법질서 아래서도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사함을 받았다는 너무나 엄청난 최고의 복을 강조하지 않는다.
내가 눈물로 자복하고 뉘우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와 함께 죽으시고 삼일 만에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신분을 주시고자 부활의 옷을 입혀 주시고 살리신 영으로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이것을 몰랐던 어리석음에 대한 눈물과 통회자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복이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는 다른 복을 받으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런 복을 받아야 잘 믿는다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있으니 너무나 한심한 것이다. 아직도 십일조에 대해서 일종 돈으로 내는 십일조만 강조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만일 돈으로 내야 한다면 내가 평생 벌어도 다 갚을 수 없으며 내 자손들이 그리고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다 갚을 수 없다.
물론 돈으로 내는 십일조를 전혀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 돈으로 내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 삶의 십일조, 기타 여러 십일조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영혼을 살려야 되는 일이라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신앙생활 속에 제일로, 최고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십일조가 아니겠는가? 헌금 중에서 제일 중요한 헌금이 십일조라고 본인도 인정한다.
천하 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주님과 한 몸이 된 것을 그 영혼에게 입증하고 주님 앞에 바쳐야 하는 십일조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주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쳐라. 아니 살려내라. 자신이 없다고 내가 살려내는 것이 아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어린아이처럼 아니면 사마리아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에게 식사 대접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가 아닌가?
지금 주변에서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장소를 제공하거나 사람을 데리고 오거나 간식을 준비해 오고 필요한 물질을 내는 것도 십일조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십일조 헌금을 바쳤다고 성도의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아직도 바친 것이 부족해서 더 바칠 것이 없는가하고 한 번 찾아보라. 이 말은 하나님 앞에 입중해 보일 수 있는 자세와 정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진 내 영혼을 증명해 보이는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당하지 않으신 분이다.(약 1:13) 그런데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멸망당한 일이 있다.(고전 10: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시험한 예가 너무나 많다.(출 17:2, 민 14:22, 시 78:18, 시106:14, 사 7:12, 행 5:9, 히 3:9 등)
그런데 성경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간접적으로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개역성경 말라기 3:10에서만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유일하게 시험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 특히 이 구절은 목회자들이 십일조생활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는 말씀이다. 십일조를 할 때만이라도 하나님을 시험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말라기 3:10에 ‘나를 시험하여’로 번역된 히브리어 ‘우베하누니’라고 하는데 접속사와 ‘우’와 ‘증명하다, 입증하다, 확증하다’라는 뜻의 동사 ‘바한’과 ‘나를’이라는 뜻의 목적격 접미 대명사 ‘에니’가 한데 어우러진 합성어로 시험이 아닌 “증명하다”라는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언급할 때 시험이라는 단어는 ‘바한’이 아닌 ‘나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싸’는 헬라어 페이라조와 같이 영어로 Test, Tempt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바한’은 헬라어로 도키마조 영어로 Prove라는 의미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거나 증명하는 보이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영어성경은 두 단어를 정확하게 구분하여 채택하고 있지만 한국성경은 구분 없이 모두 ‘시험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또한 영어성경에는 귀신이란 단어와 성령이란 단어를 구분되어 있는 반면 한국성경은 이마저도 구분되어 있지 않아 더욱 좌충우돌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작업을 펼치려면 많은 인재들과 재정이 절실하며 많은 시간을 요하고 있어 독자들의 기도와 성원을 부탁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망상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또한 십일조뿐만 아니라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절대로 시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이다. 아니면 내가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주셨으니까 이렇게 해보라는 간증은 더욱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신 십일조는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여 마음을 나타내고 증명하여 보이라는 의미에서 십일조를 하라는 의미임을 다시 한번 천명하는 바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나의 것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것뿐이며 주님과 한 몸이 되게 한 부활의 옷을 입고 살리신 영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 생활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말씀도 “확증”이라는 도키마조로 되어 있으며 엡 5:10에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도 시험이 아닌 증명하여 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상태를 자신 스스로 입증하고 확인하여 보라는 의미라는 것을 안다면 번역상의 단어 취사선택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말라기 3:10의 말씀 원문은 직역한다면 나 만군의 여호와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바치는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 창고에 가져와서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해야 한다. (여기서 예수님의 양식이 무엇인지 언급한 바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양식은 우리가 먹는 음식도 아니며 영혼의 양식도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너희가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내 앞에서 너희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여라.(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어 하나가 된 상태가 온전한 상태를 입증해 보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신앙의 행위도 중요하지만 신앙의 상태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내가 하늘의 문을 열어 너희에게 복을 부어주되 절대로 닳아 없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이 부어주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복이란 개념이 중요한데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언급하려면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우리가 잘 되는 것도 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사람과 확연히 구분된 복의 은총이 무엇인가? 어떤 조직이나 체계적인 법질서 아래서도 해결할 수 없는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사함을 받았다는 너무나 엄청난 최고의 복을 강조하지 않는다.
내가 눈물로 자복하고 뉘우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와 함께 죽으시고 삼일 만에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신분을 주시고자 부활의 옷을 입혀 주시고 살리신 영으로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주신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이것을 몰랐던 어리석음에 대한 눈물과 통회자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복이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는 다른 복을 받으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런 복을 받아야 잘 믿는다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있으니 너무나 한심한 것이다. 아직도 십일조에 대해서 일종 돈으로 내는 십일조만 강조한다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만일 돈으로 내야 한다면 내가 평생 벌어도 다 갚을 수 없으며 내 자손들이 그리고 주위 사람의 도움을 받아도 다 갚을 수 없다.
물론 돈으로 내는 십일조를 전혀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 돈으로 내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시간의 십일조, 삶의 십일조, 기타 여러 십일조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영혼을 살려야 되는 일이라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신앙생활 속에 제일로, 최고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십일조가 아니겠는가? 헌금 중에서 제일 중요한 헌금이 십일조라고 본인도 인정한다.
천하 보다 더욱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주님과 한 몸이 된 것을 그 영혼에게 입증하고 주님 앞에 바쳐야 하는 십일조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주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르쳐라. 아니 살려내라. 자신이 없다고 내가 살려내는 것이 아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어린아이처럼 아니면 사마리아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에게 식사 대접하는 것이 바로 십일조가 아닌가?
지금 주변에서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면 장소를 제공하거나 사람을 데리고 오거나 간식을 준비해 오고 필요한 물질을 내는 것도 십일조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십일조 헌금을 바쳤다고 성도의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아직도 바친 것이 부족해서 더 바칠 것이 없는가하고 한 번 찾아보라. 이 말은 하나님 앞에 입중해 보일 수 있는 자세와 정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진 내 영혼을 증명해 보이는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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