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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남주 (6) 강진농고 중퇴 후 부모님 찾아 시골 흙담집으로
최강인 2015-07-22 추천 0 댓글 0 조회 314

[역경의 열매] 김남주 (6)

강진농고 중퇴 후 부모님 찾아 시골 흙담집으로

주님 영접하려 철야기도 해봤지만 허사… 고아원서 사고친 후 무작정 걸어 도망도

[역경의 열매] 김남주 (6) 강진농고 중퇴 후 부모님 찾아 시골 흙담집으로 기사의 사진
김남주 총장이 다녔던 강진농고 학생들의 1960년대 실습 모습. 강진농고에선 벼농사와 접붙이기, 버섯 재배, 젖소 사육 등 다양한 실습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강진농고에 진학했다. 축산과를 지망했지만 성적이 안돼 지원자가 거의 없는 임과로 갔다. 당시 농고에는 농과, 축산과, 임과 등 세 과만 있었다. 평판측량 기술부터 감나무 접붙이기, 버섯 재배, 농기구 개량 등을 배웠다. 눈 오는 날에는 산에 가서 토끼몰이도 하며 나름 재미있게 지냈다. 가끔 사고도 터졌다. 강진농고에는 당시 무지개클럽, 성자클럽, 혹클럽 같은 불량서클들이 있었는데 종종 패싸움을 벌여 경찰이 출동하곤 했다.  

고아원에서는 때로 부흥회에 참여토록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강진읍교회까지 열을 지어 갔다. 김병두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 ‘저런 분처럼 한번 해보았으면…’ 하기도 했다. 밤에 산 기도도 하러 다녔다. 강진 만덕산 기도원에도 가고 강진읍 북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붙들고 소리소리 지르며 철야기도도 했다. 강진읍침례교회에서 열린 오관석 목사님 부흥회에도 갔었는데 방언이며 손글씨며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 주위에서 ‘윽∼윽∼’하며 방언을 하길래 나도 방언 달라며 ‘엣살 라라랏’을 계속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상화가 나타나더니 이내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보지 못한 채 망나니짓만 계속했다. 학교 간답시고 나와서 길가에 구덩이를 파놓고 시궁창 물을 넣은 뒤 나무 잔가지와 풀로 살짝 덮어두곤 했다. 지켜보다가 누군가 빠지면 깔깔대고 나한테 다가오면 시비를 걸어 싸웠다.  

싸움만 좋아하고 공부가 정말 재미없던 시절, 가장 싫어하는 수학시간에 옆 친구와 욕을 써서 쪽지를 주고받는데 수학선생이 던진 분필이 날아왔다. 죄송하다고 해야 할 내가 도리어 일어나 수학선생님게 “이 새끼 너 이리 나와! 오늘 너 죽여버릴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수학선생은 당황해서 수업을 중단하고 교무실로 오라는 말만 남기고 가버렸다. 나는 오히려 “교무실에 내가 왜 가냐”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일로 학교에 소동이 났고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둠과 동시에 고아원에서도 큰 문제를 일으켜 평호라는 친구와 함께 무작정 도망을 갔다. 성전면 방향으로 가다가다 지쳐 움막에서 잠을 자고는 영암을 지나 목포까지 사흘 길을 걸어갔다. 유달산에서 밤을 보냈는데 굶은 지 나흘째였다. 힘이 없어 동네로 내려와 우물물을 먹는데 그마저도 짭짜름했다. 시내로 와 역전 주변을 배회했다. 중국집에 찾아가 보이로 써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물만 얻어먹고 강진으로 돌아가려고 철길 따라 영암 방향으로 향했다.

마침 길가에 널어놓은 보리쌀이 있어 손으로 움켜쥐고 허급지급 먹었다. 그리곤 동네 우물로 가서 물을 들이켰더니 배속에서 불어나면서 터질듯해 죽을 뻔했다. 물어물어 성전면으로 다시 와 신작로길 재를 넘어가는데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 한 분이 손수레를 힙겹게 끌고 가고 있어 뒤에서 힘껏 밀어드렸다. 동네 가까이 오자 아주머니가 물었다. “총각들, 어디까지 가는가?” “네, 저희들 강진까지 갑니다.” “아이구, 어두워 오는데, 이 산을 넘어갈 수가 없다오.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내일 가소” “아 네, 감사합니다.”

작은 동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니 초가집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식구들이 반가이 맞이했다. 수제비를 끓여줘 세 그릇씩 먹어치웠다. 모기장까지 쳐줘서 우리는 그냥 녹아떨어져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아침식사까지 챙겨줬다. 떠나면서 감사하다는 절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수십년 후 목사가 된 뒤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봤지만 이사를 갔다고 했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결국 고아원으로 돌아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나와 아버지가 지은 초라한 흙담집으로 가야 했다. 고아원과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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